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즈하라 시게루 (문단 편집) == 여담 == * 시베리아 억류 시절 전우였던 나카지마 하루오가 오사카 나니와 상고 야구부장으로 재직할 때 학교를 찾아갔다가 당시 나니와의 투수이던 [[장훈(야구선수)|장훈]]을 보고 좌완투수가 부족한 팀 사정과 훌륭한 재목을 확보한다는 생각으로 장훈에게 고교를 중퇴하고 요미우리에 입단할 것을 제의하였다. 장훈은 뛸 듯이 기뻐하며 고향 히로시마의 형님에게 편지를 썼는데, '''"프로는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지만 배움은 때를 놓치면 기회가 없다.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한다"'''라는 형님의 충고를 듣고 미즈하라 감독의 권유를 사양하였다. 이때 미즈하라는 장훈에게 "훌륭한 형님을 두었다"라고 감탄하였다고 한다. 이후 미즈하라는 도에이 감독에 취임하여 팀의 중심타자이던 장훈과 기어이 사제의 연을 맺었고, 1976년 장훈은 고등학교 때 입을뻔 했던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게 되면서 이 둘의 기막힌 운명의 퍼즐이 맞춰진 셈이다. 공교롭게도 장훈이 요미우리로 이적할 당시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니혼햄]]의 사장은 미즈하라의 라이벌이던 [[미하라 오사무]]였다. 미하라는 당시 미즈하라 감독 시절 입단한 선수들의 정리에 앞장섰다고 한다. * [[도에이 플라이어즈]] 감독으로 임명되었을 당시, 팀의 주전 [[포수]]는 '''야마모토 하치로'''[* 1937년생. [[장훈(야구선수)|장훈]]의 나니와 상고 선배이기도 하며 1956년 도에이에 입단하여 포수와 [[내야수]]로 플레이 했다. 이후 1963년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킨테츠 버팔로즈]]로 이적했고 1967년 시즌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산케이 아톰즈]]로 트레이드 되어 그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현역 시절 투지 넘치는 플레이로 팀에 활력을 불어 넣었지만 과격한 성격으로 그라운드 안팎에서 자주 주먹다짐을 벌여 물의를 일으키는 바람에 [[깡패]] 하치로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은퇴한 뒤 해설가로 활동했지만 폭행 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얼마 안 가 사퇴하면서 야구계를 떠났고, 그 이후의 행적은 불명이다...] 였는데 미즈하라는 타격은 약하지만 투수 리드와 블로킹 등의 수비는 안정적인 백업 포수 '''안도 준조'''를 주전으로 중용했고 야마모토는 타격을 살리겠다는 의미에서 [[1루수]]로 전향하도록 지시했다. 도에이의 4번타자로 타선의 중심이기도 했던 야마모토는 미즈하라의 포지션 변경 요구에 "포수로도 충분히 잘 할 수 있는데 굳이 1루수 수비를 시키려 드느냐"면서 불만을 품은 채 [[태업]]을 일삼았고, 미즈하라는 바로 야마모토를 2군으로 강등시켜 버렸다. 이후 시간이 지나도 미즈하라가 자신을 다시 1군으로 부를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자 초조해진 야마모토는 중간에 사람을 넣어 미즈하라에게 반항해서 죄송하다며 사과했지만, 미즈하라는 '''"나한테 사과할 필요 없다. 자네가 팀 분위기를 흐리는 바람에 피해를 입은 동료들에게 직접 사과하라!"''' 며 단호하게 답했다. 결국 야마모토는 팀 메이트들 앞에서 팀워크를 해쳐서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고, 선수들은 [[독불장군]]에 [[망나니]]로 통하던 야마모토의 태도를 변화시킨 미즈하라 감독의 리더십에 감탄하며 더욱 미즈하라를 따르게 되었다고 한다. 덧붙이자면, 야마모토는 이 때 금이 가버린 미즈하라와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면서 1963년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킨테츠 버팔로즈]]로 트레이드되고 말았다. * [[한신 타이거즈]]와 맞붙은 1962년 일본시리즈 당시, 1~2차전을 내리 한신에 내준 도에이는 [[영 좋지 않은]] 분위기에서 [[야간열차/일본|야간열차]]로 [[간사이]]에서 [[도쿄]]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마침 상대팀 한신도 같은 열차에 탑승하였다. 그런데 2승으로 앞서가던 한신 선수들은 열차에서 대부분 조용히 숙면을 취한 반면, 2패로 몰린 도에이 선수들은 오히려 밤새도록 [[맥주]]를 마시고 신나게 떠들면서 이동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선수들과 같은 칸에 타고 있던 미즈하라 감독은 선수들에게 "지금 뭐하는 거야. 다들 그만하고 일찍 자라"고 한마디 할 만도 했지만, 미즈하라는 자신의 방의 커튼을 굳게 닫은 채 도쿄에 도착할 때 까지 선수들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장훈(야구선수)|장훈]]이 미즈하라에게 "그때 열차에서 왜 조용히 계셨습니까?" 라고 묻자 미즈하라는 '''"처음엔 '저 녀석들은 생각이 없는 건가 철딱서니가 없는 건가?' 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아니다, 저 녀석들은 젊다.'''[* 당시 도에이의 주축 멤버들은 나이가 20대 초중반에 불과한, 말 그대로 젊은 팀이었다.] '''저놈들이 여기서 울분을 털고 젊음과 패기로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자!' 라는 생각으로 일부러 입을 다물고 있었다"''' 며 털어 놓았다고 한다. 이후 열차에서의 미즈하라의 판단이 적중했는지, 결국 도에이는 3차전을 무승부로 끝낸 후 4~7차전을 연달아 승리하면서 창단 후 처음으로 [[일본시리즈]] 제패를 달성할 수 있었다. * 더불어 1962년 일본시리즈에서 3승 1무 2패로 앞서던 도에이가 7차전 때, 한신과 9회까지 0대 0 으로 팽팽한 투수전을 이어가다 10회초 선두타자 안타를 치고 진루타로 3루까지 나간 [[장훈(야구선수)|장훈]]이 [[타네모 마사유키]]의 [[희생플라이]]로 홈을 밟으며 1대 0 리드를 잡았다. 미즈하라는 10회말에 평소 수비가 약한 장훈 대신 대수비 요원인 '''히모토 사치오'''로 [[좌익수]]를 교체했지만 뜻밖에도 한신의 '''후지이 에이지'''가 [[도바시 마사유키]] 에게 동점타를 터뜨리며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2회초 공격, 장훈의 교체 좌익수 히모토가 타석에서 범퇴하자 미즈하라는 덕아웃 내의 선수단이 다 들을 정도로 '''"내가 실수했다. 장훈을 바꾸지 말고 좀 더 끌고 갔어야 했다"'''라며 탄식을 내뱉었고 이에 장훈은 "감독님은 나를 정말로 신뢰하고 계신다"며 뿌듯해 했다고 한다. 다행히 후속 타자 사이온지 아키오의 결승 홈런[* 그것도 한신의 [[에이스]] [[무라야마 미노루]]에게 때려낸 것이다.]과 12회말 한신의 공격을 봉쇄한 [[도바시 마사유키]]의 호투로 인해 앞서 말한 대로 그 해 일본시리즈 우승은 도에이가 차지했다. 미즈하라는 시리즈가 끝난 후 인터뷰에서 "10회 말 수비 때 장훈을 바꾼 것은 나의 판단 미스였다"면서 다시 한 번 장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각주] [[분류:일본의 야구 선수]][[분류:일본의 야구감독]][[분류:야구 해설자]][[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타카마츠시 출신 인물]][[분류:1909년 출생]][[분류:1936년 데뷔]][[분류:1942년 은퇴]][[분류:1982년 사망]][[분류:내야수]][[분류:우투우타]][[분류:요미우리 자이언츠/은퇴, 이적]][[분류:원클럽맨/야구]][[분류:게이오기주쿠대학 출신]][[분류:일본야구전당 헌액자]][[분류:간질환으로 죽은 인물]][[분류:주니치 드래곤즈/역대 감독]]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